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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스타일

한국의 5대 궁궐

by NEOS10 2025.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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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수도 서울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도시 경관을 자랑한다. 서울 도심의 가운데 남산을 비롯한 작은 산들이 도심 중간 중간에 솟아 숲을 이루고 있어 시민들의 소중한 휴식과 운동의 공원으로 할용하고 있다. 이러한 동산과 밀집 주거공간들의 혼합된 도시구조는 세계에서 보기 드믄 독특한 대도시 수도의 풍경이다.
또한, 서울에는 조선시대의 웅장한 궁궐들이 서울시내에 자리 잡고 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살아있는 역사의 도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그리고 경희궁까지 현재 5개의 궁궐이 서울시내에 남아있으며 이들 궁궐은 건축물의 집합체가 아니라 조선왕조 600여 년간의 정치적 변천사와 우리의 소중한 문화적 유산이다.

수도 서울의 시작

수도 서울의 시작은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되었다. 개성에 있던 고려를 무너 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새로운 통치 체제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기 위해 1395년 한양(서울) 천도가 결정되었고, 곧이어 경복궁 건설이 시작되었다.

1.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 왕조 최초의 궁궐이며 제일의 법궁으로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했고, 1392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서 없어졌다가 고종 때였던 1867년에 중건되었다.  조선 최초의 ‘법궁(法宮)’을 창건할 때 정도전은 ‘크나 큰 복을 누리라’는 의미로 경복(景福)이라 지었다. 하지만 궁의 규모는 의외로 소박했다. ‘근정문’은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된 자리며, 그 앞 마당인 ‘조정’에 직급별 품계석이 세워졌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천장에는 두 마리 용이 새겨져 있다. 경복궁에서 왕이 평상시 거처하며 신하들과 업무를 보던 편전이 ‘사정전’이다. 근정전 바로 뒤 편이다. 근정전보다는 작고 낮은 어좌가 놓여 있어, 수평적 눈 높이로 토론이 이뤄졌다. 신하들과 가장 경연을 많이 한 임금은 세종과 성종이었다. 세종은 무려 2011건에 달해, 조선왕조실록 전체에 기록된 경연 건수의 7분의 1에 달했다.

2.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공식적인 궁궐인 경복궁에 이어서 다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궁궐이다.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던 정종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다시 한양 천도를 단행하면서 새로 지은 궁이다.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궁궐로 칭송받는다. 조선조 5개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창덕’은 선한 것은 성스러운 것이니 왕실은 백성에게 성스러운 덕을 끼쳐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의 왕들 중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했던 왕들이 많았다고 한다. 많은 왕들이 머물면서 나라를 다스리며 창덕궁은 자연스레 조선 왕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평탄한 곳에 질서정연하게 건물이 들어서있는 경복궁과는 다르게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궁궐로 유명하다. 다른 궁궐들이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면 창덕궁은 자연의 지형에 맞게 배치되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한다. 
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독특한 궁궐 건축문화와 정원 문화를 대표하는 궁궐이다. 처음에 지어진 건축물들은 전쟁과 화재로 인해 사라졌지만 이후에 세워졌던 건축물은 조선시대 궁궐 건축의 변천사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숲과 나무, 연못, 화단, 정자 등이 환상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 후원은 창덕궁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3. 창경궁
창경궁은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자신이 머물기 위해서 지었던 궁궐입니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상왕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쪽에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이후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昌慶宮)이라 하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영역을 이루었으며, 창덕궁이 정치의 공간이었다면 창경궁은 생활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성대할 창(昌)에 경사 경(慶)을 쓴 궁궐이지만, 가장 어두운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일제가 한 때 동물원 ‘창경원’으 폄하했던 곳이다. 왕실의 주거용으로 지어져 공간도 적고 화려함도 덜했다. 정전인 ‘명정전’도 조정보다 작았다. 궁궐은 남향이 원칙이었으나 창경궁은 자연 지세에 맞춰 동향으로 지어졌다. 명전전 왼편의 ‘문정전’은 1762년 7월 4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이 일어난 곳이다.
창경궁 후원에는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큰 연못인 춘당지가 있다. 춘당지는 창덕궁을 둘러싼 언덕의 흘러내리는 작은 냇물이 모인 연못으로 춘당지 앞엔 넓은 마당인 춘당대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는 선조 때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4. 경희궁
경희궁은 광해군때 지어졌던 궁궐로 인조 이후 철종 때까지 10대에 걸쳐서 임금들이 머물렀던 왕궁이다. 창덕궁이 중건된 이후 광해군은 현 사직단 부근에 인경궁(仁慶宮)을, 그리고 서대문 근처에 경덕궁(慶德宮)을 새로  지었다. 인경궁은 1623년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보수했으므로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경덕궁은 현재의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에 위치한 궁궐로 영조대에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은 서궐(西闕)이라 불린 규모가 큰 궁궐로, 주요 전각으로는 흥화문(興化門), 숭정전(崇政殿), 자정전(資政殿), 융복전(隆福殿), 회상전(會祥殿) 등이 있었다. 경희궁은 고종 초반 경복궁 중건 때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철거되어 현재는 일부 건물만 복원되어 남아 있다.
경복궁의 서쪽에 세워진 경희궁은 옛 건물의 기단이 일부 남아있고 전체적인 궁궐 지형이 잘 남아있으며, 뒤쪽으로는 울창한 수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아직도 궁궐의 자취를 상당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5. 덕수궁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사가 구름처럼 몰린다’는 뜻의 경운궁(慶雲宮)이었다. 고종이 1897년에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선택한 후 1907년에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덕수궁의 정전 ‘중화전’은 다른 궁에서는 볼 수 없는 황금색이 찬연하다. 당시 황금색은 중국 황제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고종 스스로 황제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화전 내부 천장의 용(龍)도 발톱이 5개인 ‘오조룡’으로 황제궁의 상징이다.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생활하였고, 이때 건청궁, 태원전, 집옥재 등이 조성되었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경운궁을 사용하였다. 이때 석조전, 정관헌, 돈덕전, 중명전 등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대한제국의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어 조선과 대한제국의 건물이 조화를 이루었다. 경운궁은 1907년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자 덕수궁(德壽宮)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 종묘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태조 이성계는 법궁인 경복궁을 짓기도 전에, 선대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실 ‘종묘’ 건설부터 명했다. 그리고는 고조부부터 아버지에 해당하는 목조와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종묘의 정전은 길이 101m로 단일 건물로는 국내 건축물 중 가장 길다. 가장 왼편 방에 이성계와 2명이 부인이 있고, 그 옆으로 18개 방에 후대 왕과 왕비들이 모셔져 있다.
조선의 역대 왕 27명 가운데 종묘에 모신 왕은 19명이다. 다른 왕들은 종묘 뒤편의 ‘영녕전’에 모셔져 있다. 장소의 협소함 탓에, 정전에 모신지 5대가 지나면 신주를 영녕전으로 옮긴다는 기준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13명은 왕조에 미친 영향이 워낙 커 절대 정전에서 빼지 못하게 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까지 왕실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임금이 앉던 붉은색 ‘어좌(御座)’가 있다. 뒤로는 해와 달, 5개 산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봉도’가 자리한다. 이 병풍은 임금이 궁 바깥 행차를 할 때마다 함께 했고, 임금이 승하하면 함께 묻혔다. 임금의 초상 ‘어진(御眞)’은 후대를 위해 하나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린 초상화다. 어진을 가장 많이 남긴 왕은 태조 이성계다.
과학문화전시실에서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눈길을 끈다. 295개 별자리와 1467개 별을 밝기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측우기’도 있다. 1639년 이탈리아의 ‘우량계’보다 200년 앞선 발명품이다. 처음 발명한 세종 23년 음력 4월 29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5월 19일이 발명의 날이다. 세종과 장영실이 의기투합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 알람 시계 ‘자격루’도 이곳에서 위용을 자랑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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